4.19 혁명 희생자 분들을 모신 국립 419 민주묘지

4.19 혁명은 학생과 시민이 주축이 되어 부정한 방법으로 장기집권에만 몰두한 한심스러운 권력을 몰아낸 자발적인 평화적 민주혁명입니다. 세계사적으로 그 의미가 깊은 사건으로 국민을 위한 정권이 아닌 권력을 위한 정권은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4월학생혁명기념탑
4월 학생혁명 기념탑

 

국립 4.19 민주묘지

 

국립 4.19 민주묘지는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 당시 희생되신 분들이 잠들어 계신 곳입니다. 민주주의는 앞으로도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지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뜻한 4월의 어느 봄날 그분들의 희생과 아픈 역사를 되새기며 국립 4.19 민주묘지를 돌아봅니다.

 

국립419민주묘지-정문 개방시간-주차안내
국립419민주묘지 정문 / 개방시간과 주차안내

※국립 419 민주묘지의 개방시간은 동계 : 09시~17시, 하계:09시~18시입니다. 주차시간은 2시간 이내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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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학생혁명기념탑과 석상

※ 4월 학생혁명 기념탑 앞으로 가면 419혁명의 희생자분들께 참배를 할 수 있습니다.

 

419 혁명의 발단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을 겪게 됩니다. 이로 인해 나라는 황폐해졌고 많은 국민들은 궁핍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당시 집권하던 이승만 정권은 안정된 국민의 삶을 위해 국가를 재건하고 최선을 다해 경제발전을 도모하여도 모자란 상황에서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장기집권 하는데만 열을 올립니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신임을 잃게되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함으로써 2대 대통령 당선이 어렵게 되자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야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고 2대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은 중임 제한을 없앤다는 내용으로 헌법을 고쳐 3대 대통령까지 하게 됩니다. 그 후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 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과 이기붕은 정. 부통령에 당선됩니다. 물론 각종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얻은 결과였으며, 이에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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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학생혁명기념탑 뒤에 위치한 희생자분들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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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봉안소의 외부와 내부

※ 묘역 뒤로는 419 혁명으로 희생되신 분들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유영봉안소가 있습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는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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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기념관

※ 유영봉안소에서 참배를 마치고 4.19혁명 기념관을 들러봅니다. 관람시간은 동절기 오전 9:30 ~ 오후 4:30까지, 하절기는 오후 5:30까지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입니다.  

 

 

419 혁명의 진행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는 당시 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 후보의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시민과 학생의 유세 참여를 방해하기 위해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에 학생들은 '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 며 시위를 시작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됩니다.

대통령 선거일 이었던 3월 15일 마산에서는 부정 선거에 대해 선거 무효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집니다. 정부는 공산당이 마산시위를 사주했다고 발표하였고, 경찰은 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며 진압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행방불명되어 애타게 찾고 있던 16세의 김주열 학생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담한 모습의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됩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2차 마산시위를 벌입니다.

 

김주열시신스크랩
지난 15일의 사건때 행방불명이 되었던 소년(김주열)이 어제 시체가 되어 바다에서 견져졌다. 더구나 그 시체위에는 일부러 박은듯한 포탄이 얼굴을 꿰뚫고 있었다.

 

4월 18일에는 3천여 명의 고려대 학생들은 국회 앞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고, 시위 중 연행되었던 학생들이 풀려나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정치깡패들을 만나 피습을 당하게 됩니다. 다음날인 4월 19일에 이사실이 보도되면서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과 시민들까지 합세한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게 되고 곧 4.19 혁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잠시 소강상태였던 시위는 4월 25일 대학교수단 258명이 시국선언을 발표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합니다. 이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민들을 향해 총탄을 쏘며를 무력 진압을 단행합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더욱 강력히 요구하였으며, 국회는 대통령의 즉각 하야, 정부통령 재선거 등을 결의하였고, 미국대사와 일부 각료들은 대통령의 하야를 계속 요구합니다. 이에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자유당 독재정권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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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 대학교수단 시국선언문과 4.26 이승만대통령 하야성명 발표

 

419 혁명이 남긴것

 

4.19 혁명은 민주주의란 단순히 외형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모방한다고 하여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제대로 된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 사건입니다. 또한 국민의 지지와 신망을 얻는 정권만이 존재할 수 있으며, 허약하고 무능한 정부아래에서 경제 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국가는 민주발전을 이루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4.19 혁명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일본 동경대 학생운동, 미국 버클리대학의 반인종주의와 반전시위 등 각종 학생인권운동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의 발전은 물론 전 세계 인권 향상에 기여하신 4.19 혁명의 많은 희생자 분들께 조의를 표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져봅니다.

 

 

419 혁명 국민문화제

 

4월 8일부터 4월 19일까지 강북구 일원에서는 자유, 민주, 정의의 4.19 혁명 정신을 계승하는 '4.19 혁명 국민문화제'가 열립니다. 아마도 가장 관심 있는 행사는 4월 18일에 열리는 락뮤직 페스티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의 아픈 역사 중 의 하나인 4.19 혁명이 지금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며, 4.19 정신을 계승하는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래 '419혁명 국민문화제 포스터' 이미지를 클릭하거나 터치 하시면  '419혁명 국민문화제 공식홈페이지'로 이동합니다.

419국민문화제홍보포스터
4.19혁명 국민문화제 홍보포스터 (출처:강북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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